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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불멸의 교향곡 / 베토벤 심포니 제5번과 베토벤의 생애

음악사 junydei 2009. 4. 23. 16:58





 

Ludwig van Beethoven(1770 ~ 1827 / 독일)

 

'베토벤'은 1770년 12월 16일 독일 본에서 태어나 1827년 3월 26일 오스트리아의 비인에서

57세로 세상을 떠난 작곡가이다.

Powerful and Passionste Immortal Thunderer


고전주의 음악의 최후의 그리고 고금을 통한 가장 위대한 음악가라고 한다면 두 말할 것도 없이 '베토벤'의 음악이 역사와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 인류의 정신 문화에 끼친 영향을 생각하면 음악사 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상에서도 '베토벤'은 드물게 보는 역사의 창조자로서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고, 위대한 업적을 우리 인류문화에 남겨준 음악가라고 하겠다.


오늘날 온 인류가 '베토벤'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의 정신적인 영향을 받고 있을 뿐 아니라, 그를 악성으로 추앙하는 이유는 단지 그의 음악이 아름답다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차원 높은 우리 인류의 공통된 철학세계를 추구하고 숭고한 인간 정신의 진리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베토벤'의 작품들은 곧 그의 사상의 표현이며 동시에 생활의 반영이다. 따라서 그의 전 작품은 '베토벤'의 전 생애를 장식한 그의 역사인 동시에 그의 인간과 사상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흔히 '베토벤'의 생애를 불행한 일생이라고 한다. 사실 역사상 '베토벤'처럼 고르지 못한 환경에서 일생을 보낸 음악가도 드물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불행은 그가 가난했다거나 귀머거리가 되었다거나, 일생을 독신으로 보냈다거나 하는 것으로만 대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의 일생이 오직 인간의 공통된 운명과 대결하고 그와 투쟁하는 과정에서 끝냈다는 심각한 정신 환경이 더욱 불행했을지 모른다.



교향곡運命」제5번 c단조 op.67  Sympony No.3 in c minor "Schicksal", op.67


베토벤의 9개의 교향곡 중에서, 아니 모든 교향곡 중에서 이 작품만큼 만인에게 사랑을 받는 교향곡도 별로 없을 것이다. 이른바 운명의 동기라고 하는 제1악장 제1테마의 4음은, "운명이 이같이 문을 두드린다"라는 데서부터 이상한 감을 주고 있다. 그것은 새로운 시대의 정신이며 새로운 음악의 세계이기도 하다. 본래 이 곡은 교향곡 제3번의 완성 직후에 착수했지만 일시 중단하고 교향곡 제4번을 먼저 완성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1803년부터 1808년 초에 작곡한 것이므로 이 곡을 완성하는 데는 5년이 걸린 셈이다. 그의 불굴의 투지는 모든 고난과 공포와 비극을 극복하고서 마침내 승리의 개가를 구가하는 그의 이념을 여기서 잘 표현해 놓았다. 1808년 12월 22일 안 데아 비인 극장에서 초연하였으며 그의 후원자였던 로브코비쯔 공작과 라주모프스키 백작에게 헌정되었다.


지금듣는 베토벤의 5번 교향곡을 듣고 있으면 환희와 희망과 용기가 가슴속에서 뭉클하게

느껴집니다...베토벤의 초인적 분투와 각고의 노력으로 고난을 극복하고 인류에게 용기와 위안을

주는 베토벤이야말로  영웅대열의 맨 앞에 서야 할 것입니다.

 

베토벤은 귓병 요양차 경치가 아름다우며 공기 맑은 빈 교외의 하일리겐슈타트에 머물며

요양및 작곡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1802년 10월 6일  비통한 내용의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작성하였습니다.  인근 성 미카엘 교회의 종소리를 들을 수 없어 절망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이 유서를 썼다는 프로부스 거리 6번지 유서의 집에는 그의 흉상과 그가 사용하던 피아노,교향곡 5번의

초고,유서사본 (원본은 독일 함부르크에 있슴)이  이 교향곡 5번을 작곡할 떄의 절망감을 잘 나타내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곁에 있는 사람이 멀리서 들려오는 피리 소리를 듣느데 나는 전혀 들을 수 없다. 나에겐 더 이상

 내가 작곡한 음악을 들 을  수 없구나...절망에 빠져 살아가고 싶지 않다...아직은 오직 예술만이

  나를 지탱해주고 있다. 나에게 주어진 창조적 영감을 완전히 표현해 낼 때까지 세상을 떠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비참한 삶을 견뎌내고 있다"

 

이러한 내용의 유서를 쓴 후 베토벤은 다시 일어나 한층 강인한 정신으로 이전보다 더 눈부신

창작 활동을 하였습니다.

 

교향곡 No.5 C minor  <운명>

<베토벤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내적인 사상이며, 그의 남모를 고뇌이기도 하고,

억압된 분노이자 실의 속의 몽상과 환영이며 그의 환희이기도 하다.>고 베를리오즈는 말합니다. 

 

악기 편성 : 플루트 2, 오보 2, 클라리넷 2, 바순 2, 혼 2, 트럼펫 2, 팀파니, 현5부

                 제4악장에서는 여기에 피콜로, 콘트라 바순, 트럼본 3 이 더해집니다.

 

제 1악장: Allegro con brio C단조 2/4박자
소나타 형식으로 서두는 '이처럼 운명이 문들 두드린다'라고 베토벤이 말했다고 후에 베토벤의 제자가 전하는 유명한 '따따따 딴' 4개의 음으로 시작된다. 그 단순한 주제가 어떻게 변화하여 갖가지 형태로 변화하는 가를 들어보시라. 흔히들 베토벤 교향곡 5번은 1악장만이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오해를 초심자들은 가지고 있다. 2악장부터 4악장까지 1악장에서 보여준 그 운명과도 같은 고뇌가 어떻게 승리와 환희로 이어지는지가 실은 이 곡의 핵심이다.
  

 

제 2악장: Andante con moto Ab장조, 3/8박자
두개의 주제를 가진 자유롭고 아름다운 변주곡이다.
  

 

제 3악장: Allegro C단조 3/4박자
스케르쪼 악장으로 1악장의 주제가 다시 나타나 구조의 견고함과 통일감을 준다. 3악장은 끊이지 않고 바로 4악장으로 이어지면서 곡의 큰 클라이막스를 만든다.

  

 

제 4악장: Allegro C장조 4/4박자

제 3악장의 신비적인 c단조의 스케르쪼에 비하여 제 4악장은 아주 맑다. 마치 개선하는 것 같이 전부 합주하면서 힘차게 시작된다. 힘차고 호탕한 악장인데 지금까지 긴장된 것이 점차 부풀어 올라 마침내 폭발하면서 웅장한 테마가 모습을 나타낸다. 그리하여 모든 수단과 표현을 다해 환희의 경지에 도달시키는 것이다. 운명을 극복하고 승리의 기쁨을 나타낸 것이라고 하겠다. 그의 정신 생활의 일대 소산이며 그의 사상이기도 한, 모든 역경을 극복하고 마침내 승리한다는 투쟁과 승리의 기록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작곡가의 생애 (1770.12.17 -1827.3.26)

그의 조부 루트비히는 플랑드르에서 이주한 본의 궁정악장이었고, 아버지 요한은 본의 궁정가수였으며, 어머니 마크달레나는 궁정요리장의 딸이며 공정의 심부름꾼으로 미망인이었다. 이들 사이에서 1770년 베토벤이 태어났다.


그의 세례일은 70년 12월 17일로 되어 있으나 명확한 출생일은 알 수 없다. 플랑드르의 중후한 기질, 독일의 엄격한 논리, 라인지방의 희노애락이 심한 감정, 그리고 제2의 고향이 되는 빈의 부드러운 분위기가 베토벤음악의 배경이 된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피아노 기초를 배웠고 7세 때 연주회에서 피아노협주곡을 연주하여 풍부한 재능을 보여주었다.

 

소년시절 본에서 아버지를 비롯하여 몇 사람의 음악가로부터 개인교수를 받지만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람은 10세 때부터 베토벤을 가르친 네페였다. 제2의 모차르트가 될 것이라고 그의 재능을 절찬한 네페는 J.S. 바하와 C.P.E.바하의 작품을 가르쳤다.
11세 때 최초의 작품을 출판한 베토벤은 오르간과 피아노 연주가로서도 활동하였다.


16세 때 모짜르트를 동경하여 빈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어머니의 급병 소식을 듣고 본으로 되돌아왔다. 어머니의 죽음은 주벽이 심해진 아버지를 폐인으로 만들었고, 어린 베토벤에게 집안 생계를 맡기는 결과가 되었다.


실의에 찬 그에게 용기를 준 것은 브로이닝가(家)의 따뜻한 분위기였으며 그 집 딸 엘레오노라는 베토벤의 첫 애인이 된다. 뒤에 후원자가 되는 발트슈타인백작도 87년에 본으로 부임하여 물심양면으로 베토벤을 도와준다.

 

92년 본을 방문한 하이든에게 작곡가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은 베토벤은 하이든의 제자가 되려고 21세 때 다시 빈으로 떠난다.
92년 빈에 도착하여 하이든·센크·알브레히츠베르거 밑에서 먼저 작곡기법을 배우는 동시에 피아노의 명수로서 귀족들 사이에서 점차 높은 평판을 얻게 된다. 빈 생활 3년째에 연주회에서 피아니스트로서 자작 피아노협주곡 제 2 번을 연주하여 데뷔하였고, 작곡가로서는 <피아노 3중주곡집>을 출판하였다.

 

96년에는 보헤미아와 독일로 연주여행을 하는 등, 연주·작곡 양면에서 순조롭게 성장하여 1800년에는 자신의 연주회를 빈에서 열고 교향곡 제 1 번을 초연하였다. 이듬해에는 구이차르디와 사랑에 빠져 피아노소나타 <월광>을 작곡하였지만, 27세 무렵부터 느꼈던 난청이 음악가로서 치명적인 귓병으로 악화되자 1802년에는 자살까지 결심하였다. 그러나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계기로 교향곡 제 3 번 <영웅>, 교향곡 제 5 번 <운명>, 오페라 <피델리오>등 수많은 걸작들을 계속 작곡하게 되었다.


1808년에 베스트팔렌국왕이 카셀궁전의 악장으로 초빙하자 좋은 경제적 조건 때문에 카셀로 가려는 결심을 굳힌다. 그러나 베토벤의 음악을 사랑하고 재능을 존경하는 루돌프대공을 비롯한 빈의 세 귀족들이 연금을 서로 출자하여 베토벤을 평생 오스트리아에 정주시키도록 만들었다. 1809년부터 12년까지의 시기에는 피아노협주곡 제5번 <황제>, 피아노 3중주곡 <대공>, 교향곡 제 7 번과 제 8 번 등 다채로운 작품을 작곡하였다.

 

13년부터 16년까지는 사랑편지 <내 불멸의 애인이여>의 상대방인 브렌타노부인과의 비극적인 사랑 때문에 자주적 작곡활동이 침체하였으나, 17년에는 <전쟁교향곡>과 오페라 <피델리오>의 상연이 빈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18년부터 청각을 거의 잃은 베토벤은 필담(筆談)에 의해 생활해 가면서도 피아노 소나타 <하머클라비어>를 비롯해 후기의 걸작군을 창작해 갔다. 베토벤음악의 총결산인 교향곡 제 9 번 <합창>은 24년 5월 7일 빈의 쾰른트나투르극장에서 80명이 넘는 오케스트라, 4명의 독창자, 약 100명의 합창단에 의해 초연되었다.


26년 12월부터 간경변 때문에 수술을 되풀이했으나 27년 3월 23일에는 죽음을 깨닫고 유서를 썼으며 3월 26일 56세의 나이로 생애를 끝마쳤다.

 

본에서 접촉하고 배운 여러 가지 양식을 짙게 반영한 학습시절이다. 건반악기를 위한 3개의 선제후(選祭侯)소나타(W褥O47, 1783)는 C.P.E. 바흐와 만하임악파의 영향과 함께 그의 독자성도 나타나 있다. 모차르트에 대한 찬미는 3개의 클라비어 4 중주곡(W褥O36, 1785)에 나타나 있다.

 

개인교수에 의한 대위법 학습으로 시작되는 이 시기는 고전파 기악양식을 습득·발전·실험함으로써 독자적 양식이 차츰 선명하게 나타난 시절이다. <피아노 3 중주곡집(작품1, 1794~95)> 과 <피아노 소나타집(작품2, 1793~95)>에서 4악장 구성, 소나타형식의 확대, 스케르초 사용 등, 베토벤의 새로운 면이 나타나 있다. <현악 4 중주곡집(작품18, 1798~1800)>에서는 대위법적 수법이 적극적으로 도입되어 있다. 그 밖에 교향곡 제 1 번과 제 2 번, 피아노소나타 <비창>, 피아노협주곡 제 1 번과 제 2 번이 이 시기에 속한다.

 

그가 쌓아올린 극히 논리적 형식 속에서 감정의 흐름을 극적으로 전개하는 새로운 양식에 의하여 이 시기에 걸작이 속출되었다. 교향곡 제 3 번 <영웅>부터 제 6 번 <전원>에 이르는 4곡의 교향곡, 코리올란서곡, 피아노협주곡 제 4 번, 바이올린협주곡, 라주모프스키현악 4 중주곡집, 오페라 <피델리오>등이 1808년까지 탄생되었다.


1809년 이후 구축적인 주제의 전개를 중심으로 한 양식에서, 피아노 3 중주곡 <대공(작품97, 1810~11)>에서 보여준 것처럼 선율적 주제에 의한 서정적 양식으로 변해갔다. 한편 교향곡 제 7 번(작품92, 1811~12)과 제 8 번(작품93, 1812)에서는 리듬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작품의 침체기가 되는 1813년부터 16년까지의 시기는 가곡집 <멀리 있는 애인에게(작품98, 1815~16)>을 비롯하여 기악작품에서도 낭만파적 색채가 강해지는데, 17년에 착수한 피아노소나타 <하머클라비어(작품106, 1818년 완성)>를 출발점으로 다시 거대한 형식으로 되돌아가 후기양식의 정상으로 올라선다.


후기양식의 뚜렷한 특색은 푸가로 대표되는 대위법적 수법 및 변주기법을 중요시한 것이며, 시대를 초월한 다채로운 울림의 세계를 창조해갔다. 성악과 기악이 일체화된 <장엄미사곡>과 교향곡 제 9 번, 피아노소나타(작품106, 109, 110, 111) 4곡과 <디아벨리변주곡>, 현악 4 중주곡(작품127, 130, 131, 132, 135)의 5곡과 대(大)푸가는 바로크시대부터 최성기 고전파에 이르는 음악을 베토벤이 총결산한 작품으로서 주목된다.

 

시대적 배경

베토벤은 1770년에 태어났고 1827년에 사망하였다. 이즈음은 세계사적으로 1765년에 와트가 증기기관을 완성했고, 1776년에 미국이 독립선언을 했다. 1789년에는 프랑스 혁명과 인권선언이 있었고, 1814년부터 1815년엔 빈 회의가 있었다. 조선 영조가 1776년에 물러나 정조가 보위를 받았고, 1800년부터 순조가 1834년까지 보위에 있었으므로 우리 나라에선 정·순조 시대, 중국으론 청나라시대 살았던 사람으로 볼 수 있다.

 

  베토벤은 음악사적으로 바로크시대(1600∼1750)를 지나 고전주의 시대 즉 클래식(Classic)시대, 형식주의 시대에 태어나 고전주의를 완성하고 낭만주의 시대를 연 작곡가이다. 고전주의 시대의 정신적 배경은 계몽주의(Enlightenment) 사상으로 대표되는데, 계몽주의는 인간의 분별력과 판단력 같은 이성으로 더 행복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사상이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의 신념과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구호가 당시의 철학과 예술에 큰 영향력을 주어, 단순하고 인간적인 자연스러움이 있는 고대의 예술과 사상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이렇게 해서 문학에서는 바로크 시대의 시적이고 신비적인 소재를 벗어나 보다 인간적이며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소재를 찾았고, 건축과 미술 분야에서는 화려한 바로크 양식에서 벗어나 고대 그리스·로마 예술의 단순한 균형미를 수용하였다. 음악에서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음악이 자연스럽다고 보고, 일정한 규범 안에서 선율적 단순함을 토대로 하였다. 고전주의 음악의 선율구조는 바로크 시대에 비해 짧고 간결했으며, 더 온음계적이며 보다 모티브적으로 사용되었다. 하나의 주도적 선율이 음악을 이끌어 가는 호모포니 양식이 주를 이루어 음악이라는 유기체를 흐르는 혈액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새로운 박자형식이 나타나 규칙적인 박자를 반복함으로써 시간적인 예측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강, 약, 중약, 약의 규칙적인 강세가 박자에 나타나 '시간'이 최초로 긴장과 역동적인 힘을 가지는, 음악에서의 맥박이 되었다. 또한 지나친 심각함이나 유쾌함 즉 극단적인 비극이나 희극을 피하여 단순 명료하며 균형 잡힌 음악을 선호하였다. 사회적으로는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려고 했고, 베토벤 역시 계몽주의 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실천하려 하였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은 사상의 중심을 이루던 교회의 권위를 더욱 약화시켰다. 자연과학의 발달과 기술의 발전은 산업혁명을 낳았고, 이에 의한 부의 축적으로 중산층이 나타나 시민이 중심을 이루는 사회를 이루었다.

 

  18세기의 음악에 대한 관념은 계몽주의와 자연주의의 영향으로, 복잡하고 인위적이며 양식화된 바로크 시대 음악에 반대해 자연적이고 우아한 고대 그리스 로마 예술을 동경하여 인본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방식 등을 선호하였고, "음악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사용될 하느님의 선물"(A.Werckmeister,1691) 이라는 바로크 음악의 정의에 비해 고전주의 시대에는 음악을 "인간의 해악 없는 사치품이며 귀를 크게 발전시키고 만족시키는 것"(C.Burney,1776)이라고 정의는 것에서 잘 표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이든은 음악이 모든 사람에게 이해되기 위해'넘어서는 안 될 음악적 규범'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고전주의(형식주의) 시대의 음악은 이'음악적 규범'안에서 아름답고, 쉽게 이해할 수 있고, 감정과 이성, 내용과 형식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게 되었고, 이후 이러한 음악적 규범이 베토벤에 의해 깨지면서 낭만주의 시대는 열리게 된다

 

출처 : 색소폰
글쓴이 : 최인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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