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시련을 이겨낸 예술인들
음악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우리의 마음에 위로와 평화를 안겨주는 예술임에 틀림없지만, 사회, 경제, 그리고 교육에서조차도, 가장 먼저 제거의 대상이 되는 것 또한 음악이다. 예술이란 대체적으로 기본 생활 필수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공감하고 감동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음악 역시 의식주의 기본 생계를 위한 필수적인 것이 아님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나라가 전쟁을 겪고 있거나, 쓰나미가 한바탕 한 도시를 휩쓸고 간 자리, 경제적 빈곤에 처한 상황에서 음악회 같은 음악의 제반 활동은 하루하루 생사와 싸우는 이들에게는 사치요 모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를 돌이켜보면, 이런 시련을 성공의 수단으로 전환시켜 큰 업적을 남긴 사람들이 있다. Kleenex (크리넥스)하면 Kimberly-Clark사를 빼놓을 수 없는데, Kimberly와 Clark라는 두 청년이 전쟁터에서 싸우며 필수품인 일회용 화장지의 필요성을 느끼고 돌아와 뛰어든 사업이 오늘날 크리넥스의 일인자가 되었고, Bang & Olufsen (뱅앤올룹센)이라는 오디오 역시 전쟁에서의 가장 핵심인 통신망을 담당했던 두 사람이 조금 더 나은 통신수단 장비를 위한 연구의 시작이 오디오계의 황제로 만들어 주었던 것이 아닐까. 오늘날 가장 편리하고 긴요하게 쓰이는 메모지인 3M의 Post-it이 접착에 실패한 동료 Silver (실버)의 경험을 바탕으로 착안된 Arthur Fry (프라이)의 발명품이고 모닝커피와 같이 아침식사에 즐겨 먹는 베이글이란 빵 역시 어느 유태인의 실수로 재료를 반죽하는 과정에서 yeast (이스트)를 깜빡 잊고 구워낸 사례에서 비롯된 것들도 좋은 예라 하겠다.
음악계에서도 이렇게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개인적 어려움을 딛고 끝까지 살아남음은 물론, 더욱 유명해진 행운의 사람들이 있다. 슈베르트는 단명을 했었기에 유명세를 누리지 못했기도 하지만, 고전에서 낭만으로 접어든지 오래인 시점에서 이젠 더 이상 유행이 아닌 소나타 형식을 그리도 고집하고 작곡을 했기에 풍요로운 삶을 기대하기란 조금 무리였을 듯하다. 반면 현명한 쇼팽은 애국심에 불탔지만, 자기의 예술을 위해 파리로 건너왔고, 폐병에 시달리면서도 존 필드나 훔멜같은 조금 덜 유명한 작곡가들의 작품들을 여유롭고 안전하게 살짝 자기의 것으로 소화해 조르쥬 상드여사와의 청춘사업자금?에 조금이라도 기여를 하지 않았던가...
“불새 (The Firebird)”라 하면 무용을 하는 사람들은 Michel Fokine (포킨)을 떠올리겠지만 같은 단어를 보고 음악인들은 Igor Stravinsky (스트라빈스키)를 금방 떠올릴 것이다. 1914년 조국인 러시아를 떠나 스위스를 거쳐 파리에 정착한 스트라빈스키는 제1차 세계대전 후 신고전주의 작풍으로 전환하였고 Serge Diaghilev (디아길레프), Georges Balanchine (발랜쉰)과 같은 안무가들과 손을 잡고 발레음악을 통해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다.
1918년에 작곡한 “병사 이야기 (Histoire du Soldat)”이나 1930년 작품인 “시편교향곡 (Symphony of Psalms)”, 대표작 중 하나인 “풀치넬라 (Pulcinella, 1920)”의 공통점은 바로 신성한 작곡기법과 악기들의 편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대규모의 오케스트라 대신, 현악 앙상블과 독창자들, 또는 챔버 오케스트라와 합창 등, 바로크시대를 연상케 하는 소규모 악기 편성을 시도했다.
그는 아마도 음악사의 인물 중 가장 혁신적인 동시에 찬사와 비평을 혹독하게 받은 작곡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새로운 음색을 창조하겠다는 혁신적인 생각에는 어린 시절 피아노 레슨의 영향도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피아노 음악에는 절대적으로 페달 사용을 금하고 있다. 울림의 효과보다는 instant (순간적) 소리에 매력을 느꼈고, 타악기적인 성향을 선호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더 정확하고 현실적인 이유로는 전쟁과 사회적 상황을 극복해보려는 경제적 알뜰함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전쟁에서 회복하려면 정신적, 심리적, 경제적인 면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이런 때에 음악과 같은 사치 문화에 거액을 투자할 인물도 없을 것이며, 그런 연주를 보러 올 관객 또한 없음을 깨닫고, 지극히 현실적인 측면에서의 “실용적인 예술”을 연구했음을 알 수 있다.
스트라빈스키는 이색적인, 그러나 음악의 기초와 전통을 완전히 무너뜨리지 않은 소규모 편성 등을 통해, 비용을 절감 할 줄 알았던 현명한 작곡가였다. “시편교향곡”은 종교를 다루는 면에서, 고난과 절망에서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주제로 현악기를 동원하지 않고 오로지 금관과 목관을 위한 악기 편성으로 막대한 비용 절감을 했다. 이처럼 저렴한 값에 가장 고귀하고 숭고한 음악으로 나약한 인간들에게 힘이 되어주는 곡들로 큰 성과를 거둔 것이다.
Sergei Rachmaninov (라흐마니노프) 또한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망명하여 가슴에는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평생 품고 살았지만 할리우드 진출까지 시도했던 그의 음악은 스트라빈스키의 작품과 함께 eclectic 음악 (절충주의)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Eclectic 예술은 오늘날 cross-over격으로 전통 클래식 음악가들 사이에서는 많은 비난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청중들은 그의 가슴을 파고드는 애절함과 끓어오르는 열정적인 선율에 빠져들었기에 라흐마니노프는 예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성공했고 살아생전 명예를 누렸다.
그는 또한 카네기홀서의 데뷔 공연 후 앙콜 곡으로 미국 국가를 편곡해 연주함으로서 미국이 그에게 안겨준 기회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전할 줄 아는, 한마디로 말해 사회성과 예술성을 모두 갖춘 작곡가였다. 라흐마니노프는 다음 러브콜을 받고 싶었을 것이고, 이 정도의 성의면 미국 청중들로부터의 러브콜을 받을 자격과 태도를 충분히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음악에서 뿐 아니라, 미술 분야에서도, 이런 성공을 한 인물들이 분명 있다. Marc Chagal (마르크 샤갈)은 가장 장수한 화가 중 한명으로 손꼽을 수 있다. 그도 러시아에서 태어난 유태인이었지만 프랑스로 망명하여 예술 활동을 한다. 그의 그림들 대부분에 자주 등장하는 작은 마을이 있다. 주로 붉은 색으로 표현을 했고 이는 그가 두고 온 고향을 상징한다. 그리고 또 빼 놓을 수 없는 소재와 색으로 닭과 파랑, 흰색, 빨강색이 있는데 이는 이방인인 자신에게 예술 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준 프랑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상징하는 프랑스 국기의 색깔들이다.
몇 해 전 소마미술관에서 전시회가 열렸던 Paul Klee (폴 클레)는 그의 작품 활동에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그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음악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소유했음을 알 수 있고, 특히 그의 “Composition 시리즈”는 음악에서 볼 수 있는 엄격한 규칙을 바탕으로 한 대위법적 동기들을 찾아볼 수 있다. Klee는 모네와는 달리 색채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던 화가이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모두 스캐칭이고 색채를 통한 표현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은 훨씬 훗날이었다. Klee의 약점이 그의 무명시절 경제적 상황을 조금이나마 도와준 셈이다. 무작정 그림을 그려서 고가를 받는다는 보장이 되어 있지 않았던 무명시절에, 물감이나 다른 재료를 산다는 것은 매우 부담이 되는 일이었을 테니까.
이렇게 무명시절을 이겨내기 위해서든, 전쟁 후의 여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든, 스트라빈스키, 라흐마니노프, 샤갈, 그리고 클레 모두 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무엇보다 예술에 대한 열정과 사명감 때문이라 믿는다. 스트라빈스키는 작품들의 규모를 대폭 줄이거나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보다 다양한 형태를 시도했고, 라흐마니노프는 자신의 작품들을 대부분 초연하고 연주했으니 알뜰 공연 기획을 실천화한 것이다. 라흐마니노프와 샤갈 모두 이국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각기 미국과 프랑스에 대한 경의와 감사를 표시함이나 시기를 놓쳐 빠져나오지 못한 채 공산주의의 억압 속에서 정부의 명령과 요청에 따라 작곡을 했던 쇼스타코비치 모두 보답과 생존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어떠한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예술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함께 했던 이들이 있었기에 조금의 타협은 있지만 순수한 작품들이 남아있는 것이며 그래서 행복한 우리들이다. /조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