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릭스 멘델스존 ( Felix Mendelssohn, 1809~1847 ) 은 북부 독일 함부르크의 유태계
집안에서 태어났다.
조부 모제스는 고명한 철학자였으며 아버지 아브라함은 유능한 은행가였다.
아마추어 음악가이기도 했던 어머니 리어는 영문학과 불문학, 이탈리아 문학을 연구했다.
따라서 멘델스존의 여러 가지 재능은 모계에서 전수된 것으로 알려져있다.
멘델스존의 음악적 재능은 흔히 모짜르트와도 비견된다.
그는 부호의 집안에서 태어나 나무랄 데 없이 좋은 환경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음악가로서
는 드물게 행복한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런 탓인지 멘델스존의 음악에는 혁신적인 모습이 없다.
낭만주의 시대에 살았으면서도 본질적으로 그는 고전주의자였다.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은 유태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멘델스존 이라는 성에 바르톨
디(Bartholdy)라는 이름을 덧붙였다.
멘델스존은 독일을 사랑하고 독일인답게 사는 것을 큰 긍지로 삼았다.
그러나 베를린 악계는 비록 개종했다고는 하지만 유태인의 아들이라고 그를 차별 대우했다.
그로 인하여 그는 베를린을 떠나 유태인에게 관대한 라이프치히로 활동 근거지를 옮겼다.
그곳에서 그는 전통 있는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의 지휘를 맡음으로써 라이프치히를 유럽
음악의 중심으로 끌어 올렸다.
또한 < 마태 수난곡 > 등 바하가 세상을 떠난 후, 사장되어왔던 걸작 들을 다시 소생시킨
그의 공로는 창작활동 못지 않은 큰 업적으로 평가 받고 있다.
1847년 5월 평생 사이좋게 지내왔던 누이가 사망했다는 슬픈 소식을 접하고 상심한 나머지
시름시름 앓던 그는 여섯 달 후인 그해 12월 누이의 뒤를 따라 세상을 하직했다.
멘델스존의 가족들
펠릭스 멘델스존의 아버지 아브라함 멘델스존은 상당히 수완 있는 은행가로서 많은 부를
축적했지만 철학자로서 당대에 이름을 날렸던 자신의 아버지 모제스, 즉 멘델스존의
할아버지만큼은 세상에 알려지지 못했다.
또한 음악가로서 대성한 아들 펠릭스 역시 그보다 지명도가 높았다.
어느 날 아브라함은 친구에게 자조적인 어조로 말했다. " 어떤 좌석에서는 내가 모제스
멘델스존의 아들이라고 소개되는가 하면 어떤 자리에서는 펠릭스 멘델스존의 아버지라고
소개되기도 하니, 나라는 존재는 아버지와 아들을 잇는 하이픈일 뿐일세...
" 모차르트와 멘델스존은 유사한 점이 많았다.
두 사람 다 어려서부터 비범한 악재를 나타냈고 그림 솜씨 등 다른 분야에서도 범상치 않은
재능을 지니고 있었으며, 가족 구성에서 악재가 풍부한 연상의 누이를 두고 있었다는 것도
공통점이라 하겠다.
어릴 때부터 비상한 연주 솜씨를 보인 피아니스트였던 모차르트의 누이 난넬처럼 멘델스존
의 누이 파니 역시 피아노 연주자 겸 작곡가로서 일찍부터 이름을 날린 여성이었다.
물론 두 사람 사이에 차이점도 있었다. 모차르트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에게 끌려 연주
여행을 다녔지만 부유한 멘델스존의 아버지는 그런 일을 극도로 삼갔다.
그 때문에 멘델스존은 유년 시절 공개 연주를 그다지 많이 하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결혼 후에 나타났다.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는 알다시피 말썽 많은 베버 집안에서 데려온 여성이었으므로
아버지와 누이 난넬은 두사람의 결혼을 강력히 반대 했다.
특히 난넬과 콘스탄체는 평생 사이가 좋지 않았다. 반면, 멘델스존의 아내 세실 장르노는
프랑스 개혁파 교회 목사의 딸로서 지적이며 품성이 훌륭한 여성이었다.
멘델스존의 누이 파니도 그녀를 높이 평가했고, 두 여성의 사이는 더없이 좋았다.
이에 대해 후대의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 멘델스존은 아무런 재능이 없었더라도 역사에
남을 사람이었어. 누이와 아내를 잘둔 덕에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화목한 시누이와 올케'
라는 기록을 세웠으니까 말이야."
영국에 갔을 때 멘델스존은 빅토리아 여왕 임석하에 어전 연주를 한 일이 있었다.
연주가 끝나자 여왕은 그의 여러 작품 가운데 특히 가곡 몇 곡이 퍽 마음에 든다며 극구 찬양했다.
그러나 칭찬을 받은 멘델스존은 내심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가곡들의 작곡가는 사실 그가 아니라 누이인 파니였기 때문이었다.
피아노 연주와 작곡에도 재능이 있었던 누이 파니는 남동생에게 자기도 작곡가가 되고
싶다는 뜻을 밝힌 적이 있었다.
그는 여자란 남편을 잘 섬기고 아이들을 훌륭히 키우는 게 제일이라고 하며 그것을 단호히
반대했고, 결국 두 사람은 타협안으로 파니의 작품을 펠릭스 멘델스존이라는 이름으로
출판하는 데 동의했던 것이다.
아무튼 빅토리아 여왕 폐하는 본의 아니게 다른 작곡가의 작품을 찬양한 결과가 되어 버렸
다.( 만약 멘델스존이 누이한테 한 것과 비슷한 진언을 여왕 앞에서 했다면? )
만능 천재
멘델스존은 거의 만능에 가까운 재질을 타고난 데다 어렸을 때부터 교양이 풍부한 양친의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았으므로 여러 분야에서 특출한 재능을 발휘했다.
우선 음악 분야에서 그는 위대한 작곡가였음은 물론이고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의 한
사람이었으며 최대의 지휘자이자 역시 최고 위치에 있는 오르가니스트였다.
만약 본인이 마음만 먹었다면 대 바이올리니스트도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음악 이외의 분야로는 역사, 지리, 문학, 철학 등등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모국어인
독일어 외에 이탈리아어,프랑스어,영어,그리이스어,라틴어 등 각국의 언어에도 능통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자연과학에도 조예가 깊었을 뿐더러 회화에까지 재질을 보여
수채풍경화 솜씨는 아마추어의 범주를 벗어날 정도였다.
이와 같은 대천재가 불과 38세의 나이에 요절을 했으니, 많은 사람들이 애석해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죽음을 아쉬워하는 사람들 속에서 어떤 이들은 이런 대화도 나누었다고 한다.
" 38년이라니, 너무 짧은 인생이었어! "
" 무슨 소리야? 그렇게 많은 재능을 짊어지고 그 이상의 인생 항로를 가라는 것은 무리한 바람이지. "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의 실내악 콘서트에서 멘델스존은 자작 곡인 g단조 피아노 3중주곡의
피아노 파트를 연주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차질이 생겨 그가 칠 피아노 파트악보가 도착하지 않았다.
멘델스존의 기억력이 특출하다는 것은 거의 모든 사람들의 알고 있는 신화적인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로서는 자신의 비상한 기억력을 괜히 과시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다른 악보를
피아노 보면대 위에 놓고 때때로 페이지를 넘기 면서 착오 없이 무사히 연주를 끝냈다.
문득 바이올린 주자가 피아노 파트 악보를 보다가 깜짝 놀라 말했다.
" 아니, 이건....."
" 그래 다른 곡이야 "
멘델스존은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자네들 앞에서 암보로 치면서 시시하게 점수를 딸 생각은 추호도 없어 그렇게 한 것일뿐이야."
낭만주의 시대를 살아간 고전주의자
보수적인 경향이 농후했던 멘델스존은 낭만주의가 한창 꽃피던 시기에 살았으면서도
자신과 동시대에 살면서 활약한 작곡가들의 작품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슈만, 쇼팽, 리스트, 베를리오즈 등의 작품들을 간혹 레퍼토리에 올려 지휘하기는했지만 마음속 깊이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가 일생을 통해 귀감으로 삼은 작곡가는 바하, 모차르트, 베토벤 등이었다.
이에 대해 멘델스존보다 6살 연상인 베를리오즈는 이렇게 빈정댔다.
" 멘델스존은 죽은 자들을 너무 사랑하는 것 같군."
반면 멘델스존은 너무나 저돌적이고 분방한 베를리오즈의 음악에 반발을 느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극도의 혼란과 모순된 분규로 점철된 그의 악보를 만지고 나면 곧장 화장실로가서 손을 씻어야 한다."
멘델스존은 19세가 낭만파 계열에 속하는 작곡가로 기록되기는 하지만 고전주의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는 작곡 스타일을 추구한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그의 작품 중에서 유명한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 작품 64 >는 독일 낭만파의
진면목을 발휘하는 곡이다. 이전에도 잠시 소개했던 적이 있지만 이 곡의 특색으로는
우선 처음 두 번째 소절, 즉 현악기군의 분산화음으로 시작해 약 1초 반후에 벌써
독주바이올린이 스타트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고전주의 시대 작곡가들의 바이올린 협주곡에서는 오케스트라에 의한 긴 주제 제시가
있은 후 독주바이올린이 나오게 되어 있다. 베토벤의 작품은 독주바이올린이 시작하
기까지 무려 3분 15초 동안이나 기다려야하는 것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그날도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 독주를 맡은 아돌프 부슈는 느긋하게 기다리는자세로 서 있었다.
긴 오케스트라의 서주를 생각해서였다.
그런데 오케스트라 연주가 시작되자 그는 깜짝 놀라 허둥지둥 바이올린 을 턱에 갖다
대고 간신히 스타팅 타이밍을 맞추었다.
주최측에서 그만 깜박 잊고 연주작품이 베토벤에서 멘델스존으로 바뀌었음을 독주자
에게 알리지 않았던 것이다.
괴테와 멘델스존, 그리고 슈베르트
슈베르트는 사실 괴테의 시를 가사로 훌륭한 가곡을 많이 작곡했다.
그러나 괴테는 그 가치를 인정해주지 않았다. 반면 멘델스존은 그런 업적이 별로
없었는데도 불과 13세 때 당시 이미 72세였던 괴테의 저택에 처음 머무른 이래 여러
차례 바이마르에서 괴테의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멘델스존은 괴테의 그 같은 불공평한 처사에 오히려 마음의 부담을 느껴 이렇게 술회했다.
" 괜히 내가 슈베르트에게 빚을 진 것만 같아......"
그후 멘델스존은 마음의 부채를 갚을 심산에서였는지 미발표 상태로 묻혀있던 슈베
르트의 걸작 C장조 교향곡을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에서 초연했다.
결혼식마다 나타나는 작곡가
우리나라에서도 오늘날에는 대다수의 남녀가 서양식으로 결혼식을 올린다.
음악도 신부 입장 때는 장중한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에 삽입되어 있는 <결혼행진곡>을,
신랑신부가 퇴장할 때는 신바람 나는 멘델스존의 <결혼행진곡>을 각각 연주
하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다. 멘델스존의 <결혼행진곡>은 원래 셰익스피어의 희곡
< 한 여름밤의 꿈 >이라는 극음악의 12곡중 제 5막 처음에 아테네의 시시우스 대공과
아마존 여왕 히폴리테의 결혼 장면에서 연주되는 곡이다.
워낙 신바람 나는 곡이어서 그후 오랫동안 독일에서도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드물게 기독교의 결혼 예식에서는 멘델스존의 결혼 행진곡만을 쓰는 것이
옳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필자의 생각으로는 아주 바보 같은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얘기인즉 신부 입장시에 쓰는 바그너의 결혼 행진곡은 바그너가 기독교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단적인 것이고, 퇴장에서 쓰는 멘델스존 의 결혼행진곡은 멘델스존이 유태
인이었지만 기독교로 개종을 했기 때문에 쓸 수 있다는 논리이다.
작곡가들의 종교와 국적, 인종에 따라 그 음악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소리를
하는 것도 어디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랴만은 우리는 이러한 것들에 얽매이지 말고
순수하게 애초부터 그렇게 생각했듯, 음악자체 만을 즐기면 되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 멘델스존의 결혼행진곡은 나치가 정권을 잡은 후로는 모든 유태인
작곡가의 곡들이 연주가 금지되었으므로 멘델스존의 결혼 행진곡도 근 10 여년동안
금지곡으로 묶여 있다가 제 2차 세계대전 후에야 해금되었다.
어느 친구가 이 곡의 기구한 운명을 화제에 올리자 옆자리에 있던 못난 녀석이 의미
심장한 표정으로 자기 체험에서 터득한 듯 일가견을 피력했다.
" 결혼이란 본래 그런 것 아니겠나? 어떤 때는 신바람 나고, 어떤 때는 마누라 엉덩이
밑에 깔리기도 하고...... "
멘델스존의 음악을 좋아하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그의 음악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아마 멘델스존도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기분이 좋았기 때문에 그런 음악을 작곡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멘델스존의 인생에서 우리가 얻을 만한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은, 훌륭한 음악을
만들기 위해서 작곡가가 꼭 가난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멘델스존은 아주 드물게 부유하고 여유 있는 인생살이를 했으며, 자기가 느낀 것을
거의 다 표현할 기회를 가졌다.
그는 음악을 만들고 싶었고, 따라서 자신의 신나고 행복한 기분을 악보에 옮겨 놓았던 것이다.
따라서 멘델스존의 음악에는 심오한 철학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아니, 최소한 필자의 귀에는 그렇게 들린다. 그 대신 그의 음악 속에는 밝고 아름다운
물방울들이 소용돌이치듯 뛰노는 기분과, 웃음이 가득한 멜로디가 들어 있다.
그러면서도 얄팍하거나 공허하지 않고 오히려 훌륭하고 세련된 예술의 경지에 올라있다.
낭만주의가 모든 예술분야 에서 그 최고조로 치닫고 있을 때에 멘델스존은 이상하게
도 자기보다 먼저 시대의 것을 탐닉하는 복고풍의 멋을 부린 것 같다.
슈만, 쇼팽, 리스트, 베를리오즈, 베버와 같은 사람들이 낭만주의의 화려한 꽃송이일
때에, 멘델스존은 적어도 음악의 형식만큼은 옛대가들의 음악에서 배웠다.
그의 이런 노력의 과정에서 바흐의 음악은 새롭게 이해되고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다시 말해 멘델스존이 너무나 열심히 바흐를 연구했기 때문에 그간 잊혀져 있던
바흐의 음악은 일반에게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만일 멘델스존 자신은 음악가로 성공하지 못했다고 가정을 할 경우, 최소한
바하를 재발견했다는 업적만 가지고도 그에게는 커다란 명예가 주어질 수 있을 것이다..
멘델스존 - 봄의노래
1809년 독일 함부르크의 은행가 아들로 태어난 멘델스존은 부유한 가정에서 행복한 생애를
누렸으나 38세로 짧은 생을 마쳤다. 그는 경제적 어려움이나 사회의 어두운 면을 모르고 자라서인지
그의 음악은 밝고 명랑하며 고전적 형식미에 낭만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
<무언가>
독일의 작곡가 멘델스존의 피아노소곡집.
종류 : 피아노소곡집
구성 : 8집 각 6곡
내용
8집으로 되어 있으며 제1~6집까지는 그의 생전에 출판되고 제7 ·8집은 사후에 나왔다.
각 집은 모두 6곡으로 이루어졌으며 각기 표제를 붙여 불린 적도 있으나 작곡가 자신이
직접 붙인 것은 몇 곡 안 된다.
특히 유명한 것은 《사냥의 노래》(제1집), 《베네치아의 뱃노래》 3곡(제 1, 2, 5집),
《듀엣》(제3집), 《봄의 노래》(제5집), 《베틀노래》(제6집) 등이다.
그가 이 피아노소곡집에 처음으로 사용한 표제의 원래 뜻은 ‘가사가 없는 가곡’이라는
뜻으로,그 후 일반적인 가곡풍의 기악소곡을 가리킬 때 이와 같은 명칭이 쓰이게 되었다.
낭만파의 피아노소곡에서 많이 볼 수 있듯이 노래와 비슷한 멜로디에 단순한 반주가 따른
형식의 것이 많다.
멘델스존 - 봄의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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